최성환 CHOI SUNG HWAN
Detail
개인전
1995 - 2021
개인전(초대개인전 31회)
단체전
2006 봄을 기다리는 우리전, 울산 현대예술관
2005 코리아아트페스티발, 세종문화회관미술관
2004 대구미술의 오늘전
2004 봉산미술제
2003 생활속의 미술전, 인사아트센터
2003 희.로.애.락, 인사갤러리
2002 - 2007 한국국제아트페어 6회, 부산 BEXCO, 서울 COEX
2002 - 2003 대구아트엑스포, 문화예술회관
2002 행운을 주는 말그림전, 갤러리미루나무
2002 흥겨운 우리놀이전, 갤러리사바나
2001 대한민국 청년작가 미술축전, 서울
2001 대구밀라노 미술전, 대구
2000 청담미술제, 조선화랑
2000 광주비엔날레특별전
1999 아! 대한민국, 상갤러리
1999 한국유명작가경매전, 롯데화랑, 서울
1998 – 1999 오픈아트페어, 예술의전당
1996 – 2006 화랑미술제8회, 예술의전당
최 성 환의 그림에 대하여. . .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산새 소리가 잘 어우러진 산골의 조그만 마을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
이렇듯 화실 창 너머로 보이는 주위 풍경들에 대한 정감 어린 그의 시선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다.
한적한 시골 작업실에서 제작되는 그의 작품 들은 , 도시인의 저 깊숙이 감추어둔 유년의 추억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쪽빛과 초록, 황토, 초저녁, 미루나무, 달이 뜰 때의 깨끗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담긴 작품은 복잡한 도시생활에 거칠어진 심성을 맑은 마음으로 귀환하는데 깊은 영감을 준다.
그의 작품제작 과정을 보면 독특한 데가 있다. 먼저 마천이나 한지 위에 황토, 아교 젯소 등을 혼합하여 화면에 엷게 접착 한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 죽필로 원 하는 형태의 골격만 그려낸다. 그 후 먹 선 을 넣고 수십 번의 채색을 가하면 흙에 물감이 스며들어 놀랄 만큼 차분한 느낌을 준다.
잊혀져 가는 한국의 풍물이나 동화적 인상을 느끼게 해 주는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품들은, 소재를 과감히 생략 골격만 화면에 재구성 하는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그림의 주제가 더욱 명료하고 돋보이게 한다.
작품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점경 인물들은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절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는 작품을 통하여 자연을 사랑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최성환은 바로 이처럼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의 원형을 그린다. 그 원형의 레이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한다. 추억과 기억, 회상과 환기와 같은, 과거를 현재로 되불러오는 미학적 장치들을 매개로 옛날에 궁핍했지만 좋았던 시절을 그리고, 당시에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진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시절을 그리고, 이해타산이 아닌 있는 그대로가 좋았던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했던 시절을 그린다. 자기내면에 앙금처럼 내려앉아 지금도 여전히 현실을 건너가게 해주는 힘이며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는 호시절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내면의 고향을 그린 것이다. 오래된 빛 바랜 벽 위에 그린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림들이며,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본 것 같은 동심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소소한 서사를 그린 것이며, 소박한 꿈을 그린 것이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없고, 사람과 자연이 구별되지가 않는, 그런 평면적이고 수평적인 세계관을 그린, 삶의 삽화 같은 그림들이다. 과거를 그린 것이고 시간을 그린 것이다. 추억을 그린 것이고 회상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향을 그린 것이다. 이상향이 과거로 소급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에는 그 이면에 현실부정이 부수된다. 현실에서 상실감을 맞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그림에서 그가 상실한 것을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그가 뭘 상실했는지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되겠다. 유년의 추억이 그립고, 키 큰 미루나무와 붉은 노을의 추억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작가는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것을 되찾아주고 싶다. 비록 그것이 한갓 그림에 불과할지라도. 그리고 때론 그것이 과거지사에 지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무슨 축복인양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신을 저당 잡힌 삶이며 자기를 상실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나마 줄 수가 있다면 작가의 그림이 존재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바로, 꿈을 상실한 시대에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최성환의 회화]
유년의 추억을 그리고 내면의 고향을 그리고 이상향을 그리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유년의 추억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한 것. 특히 자본주의 시대는 경제제일주의와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생산성이 없는 것들을 변방으로 내몬다. 이런 비정한 시대며 삭막한 시대에 생산성이 없는 것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들, 아님 아예 생산성과 관련이 없는 것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이런 연유로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은 자기소외와 상실을 피할 수가 없다(소외가 곧 상실이다. 소외와 상실은 같이 간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것 중엔 고향도 있다. 이러저런 이유로 고향을 등진 아님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여기서 고향은 이런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의미하지 않는다기보다는 그 의미가 지정학적 장소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고향은 이보다는 더 궁극적이고 심층적인 것으로서, 굳이 말을 하자면 고향이라기보다는 고향감에 가깝고 상실보다는 상실감에 가깝다.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의 원형(아님 원형감정?)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최성환은 바로 이처럼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의 원형을 그린다. 그 원형의 레이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한다. 추억과 기억, 회상과 환기와 같은, 과거를 현재로 되불러오는 미학적 장치들을 매개로 옛날에 궁핍했지만 좋았던 시절을 그리고, 당시에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진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시절을 그리고, 이해타산이 아닌 있는 그대로가 좋았던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했던 시절을 그린다. 자기내면에 앙금처럼 내려앉아 지금도 여전히 현실을 건너가게 해주는 힘이며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는 호시절을 그린다. 그래서 내면의 고향(의식 아님 무의식의 저장고?)이다. 그 고향은 비록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것이지만, 개인사란 것이 대동소이한 탓에 작가의 주제며 주제의식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쉽게 공감을 얻는다. 작가의 개인사를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현대인의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내면의 고향을 그리는 것.
그렇다면 작가는 처음부터 내면의 고향을 그리고, 엄밀하게는 유년의 추억을 그렸는가. 아님, 언제 어떤 계기로 내면의 고향을 그리게 되었는가. 그에게 내면의 고향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가. 앞서 그가 내면의 고향을 그리는 것은 사실은 원형이며 원형감정을 그린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내면의 고향은 사실은 유년의 추억이었고 원형(존재론적 원형?)이었다. 원형은 존재론적 궁극(뿌리?)과 같은 것으로서 개인사적 유년보다 먼 과거로 소급되고, 개인사적 존재가 아득해지는 시간대로 거슬러 오른다. 그래서 작가가 초기에 그린 토혼 시리즈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신라시대 토기나 토우, 불두와 와불, 그리고 꽃담과 같은 우리의 원형에 해당하는 그림들이다. 작가는 이 그림들을 토혼이라고 불렀는데, 흙의 혼이란 뜻이다. 우리의 혼이 흙으로 아로새겨진 것이며, 대지가 기억하고 있는, 대지에 스며든 혼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작가는 유년의 추억이며 내면의 고향 이전에 이런 전통적인 소재를 그렸었고 원형적인 모티브를 그렸었다. 그래서 이런 원형적인 모티브와 유년의 추억이 그리고 내면의 고향이 사실은 그 이면에서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진즉에 토혼 시리즈가 이런 유년의 추억이며 내면의 고향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원형적 유전자가 각각 토혼 시리즈와, 유년의 추억이며 내면의 고향 그림 위로 분유되어졌다고 볼 수가 있겠다. 비록 저마다 그림은 다르지만, 주제 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주제(존재론적 원형으로 나타난)를 심화하고 변주시켜왔다는 말이다.
다시, 토혼이란 말은 대지에 아로새겨진 혼이란 의미이다. 작가는 바로 이 존재의 터전이랄 수 있는 흙을 바탕으로 그 위에 혼을 그리고 싶은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흙은 말하자면 주제(이를테면 존재의 바탕과 같은)로서도 그리고 재료며 기법(이를테면 실제로 흙을 부분적으로나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경우와 같은)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유년의 추억이며 내면의 고향을 그린 근작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이번에는 바탕재로서 흙이 등장한다. 올이 조밀하고 성근 마천 위에 황토와 아교를 섞어 바르고, 그 칠이 채 마르기 전에 죽필로 큰 그림을 그린 연후에, 그 위에 재차 채색을 올리면 채색이 흙에 스며들어 마치 화면의 내부로부터 배어난 듯 깊고 자연스런 발색효과를 준다. 여기서 죽필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황토 바탕 위에 죽필로 그린다는 것, 그것은 그대로 흙바닥이나 벽면 위에 낙서를 하곤 했던 추억의 질감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작가는 말하자면 오랜 풍화의 흔적이며 시간이 만든 생채기를 고스란히 탑재하고 있는 원형 그대로의 흙바닥이며 벽면의 물성을 되살리고, 여기에 낙서의 추억을 되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다시, 죽필로 그린다는 것, 그것은 엄밀하게는 아로새긴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단순한 시각적인 차원을 넘어 촉각적인 경우로까지 표현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이고, 부조랄 것까지야 없지만 미세하나마 일종의 저부조 형식으로 그 범주를 심화시킨다. 작가의 그림에선 유독 색감 이상으로 질감이 결정적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패턴이 엿보인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짙푸른 청색을 밤하늘 삼아 화면 아래쪽으로 길게 세상사가 그려진다. 점경을 이룬 사람들은 하늘에 떠있는 별이며 달을 올려다보거나 저마다의 놀이며 일에 빠져있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늘과 점경을 이룬 사람들의 대비가 사람보다는 하늘을 돋보이게 한다. 하늘로 대리되는 꿈을 강조하고 이상을 부각시킨다. 또 다른 패턴으로 부감법의 적용을 들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의 아래쪽으로 세상사가 전개되고, 잔가지를 머리처럼 풀어헤친 나무며 흐드러지게 핀 벚꽃 그리고 허공중에 하늘거리는 민들레 홀씨들이 화면의 전면에 포치한 그림들이다. 하늘을 강조한 그림에서처럼 세상사보다는 자연이 부각되고, 흡사 화면의 전면을 뒤덮은 자연에 의해 인간사가 보호받는 느낌이다. 그리고 대개는 화면 중앙에 호수가 위치하고, 호수 주변으로 집이며 나무와 살림살이가 어우러진 일련의 그림들이 주목된다. 생명에 필수적인 물을 중심으로 문명과 자연 모티브가 그 주변머리에 배치되는 식의, 다소간 관념적인 고지도의 전형을 변주하고 각색한 경우로 보인다.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그림들은 대개 이 기본형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다 뭔가. 자연이 강조되고 세상사가 자연에 부수되는 그림들이며, 자연이 부각되고 인간사가 자연에 보호받는 느낌의 그림들을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 이를테면 자연을 되불러오고 자연에 부수되는 경외감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복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 자체 일종의 이상향에 대한 작가의 관념을 반영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로 볼 수가 있겠다.